윌리엄 디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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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디터리는 독일 출신의 영화 배우이자 영화 감독으로, 무성 영화 시대부터 1960년대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제작했다. 독일에서 배우로 경력을 시작하여, 1930년 미국으로 건너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마지막 비행》, 《한여름 밤의 꿈》, 《에밀 졸라의 생애》, 《노트르담의 꼽추》 등 여러 작품을 연출했다. 1950년대에는 매카시즘의 영향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 유럽으로 돌아가 영화 제작 및 연극 연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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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디터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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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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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빌헬름 디터레 |
출생일 | 1893년 7월 15일 |
출생지 | 루트비히스하펜, 라인란트팔츠주, 독일 제국 |
사망일 | 1972년 12월 9일 |
사망지 | 오토브룬, 바이에른주, 서독 |
직업 | 배우 영화 감독 |
활동 기간 | 1911년–1966년 |
배우자 | 샬로테 하겐브루흐 (1896–1968) |
2. 초기 생애와 경력
루트비히스하펜에서 공장 노동자 야콥과 베르테(도어) 디터리의 아홉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난 빌헬름 디터리는[2][3] 어린 시절 상당한 빈곤 속에서 성장했다. 목공, 고물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으며, 어릴 때부터 연극에 대한 관심을 키워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 집 헛간에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1930년 독일 영화 산업이 악화되자, 윌리엄 디터리는 워너 브라더스의 제안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했다.[4] 초기에는 할리우드 영화의 독일어 더빙 작업을 맡았으나, 퍼스트 내셔널로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독일어로 더빙하는 일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디터리와 그의 아내, 그리고 배우 그룹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영화가 더빙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로이드 베이컨의 ''모비 딕''(1930)을 포함한 4편의 할리우드 영화의 독일어 버전에서 배우로 선택되었는데, 디터리는 이 영화에서 아합 역을 맡았다.[4] 곧 연출 능력을 인정받아 《마지막 비행》(1931)으로 영어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영화는 제1차 세계 대전 후 파리를 돌아다니며 삶을 재건하려는 네 명의 미국 전투기 조종사를 묘사했으며,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과 비교되었다.[4]
16세에 디터리는 떠돌이 극단에 잡역부, 무대 담당자, 견습 배우로 합류했다. 뛰어난 외모와 야망 덕분에 곧 연극에서 로맨틱한 주연 배우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19년에는 베를린의 연극 감독 막스 라인하르트의 눈에 띄어 1924년까지 그의 작품에 배우로 고용되었다.[4] 더 많은 수입을 위해 1921년 독일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고, 빠르게 인기 있는 조연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촌뜨기"나 바보 같은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여 인기를 얻었지만, 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1921년, 배우이자 훗날 시나리오 작가가 된 샬롯 하겐브루흐와 결혼했다.
1923년, 디터리는 자신의 자금으로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를 바탕으로 한 첫 영화 ''Der Mensch am Wege''를 제작했다. 이 영화에는 젊은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공동 출연했다.[4] 1924년, 디터리는 라인하르트의 극단을 떠나 베를린에 자신의 극단을 설립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곧 문을 닫았다. 이후 영화 연기를 재개하여 ''Das Wachsfigurenkabinett''((''왁스 박물관'')) (1924)과 F. W. 무르나우의 ''파우스트'' (1926)와 같은 주목할 만한 독일 영화에 출연했다. 1927년, 디터리와 그의 아내는 자체 제작 회사인 Charrha-Film을 설립했다. 디터리는 ''사슬 속의 섹스'' (1928)와 같이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를 다시 감독하기 시작했다.
1911년부터 1914년까지 여러 영화에 출연했고, 1918년부터 막스 라인하르트의 극단에서 베를린에서 연기를 시작했다. 1920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에 복귀하여 무성 영화계에서 자연주의·낭만주의적인 주역이나 독일 표현주의, 고딕적인 표현도 모두 소화할 수 있는 성공한 배우 중 한 명이 되었다. 1923년까지 20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한 후, 본명인 빌헬름 디터리라는 이름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첫 주연 여배우는 마를렌 디트리히였다.
디터리는 아내 샬로테 하겐부르흐와 함께 자신의 영화 프로덕션을 설립, 1920년대는 배우와 영화감독으로서 양쪽의 재능을 발휘했다. 특히 배우로서는 『뒷골목의 괴노인굴』(1924, 파울 레니 감독)이나 『파우스트』(1926, F.W. 무르나우 감독) 등에서 배우 콘라트 베이트나 에밀 야닝스를 발굴했다. 1927년 이후에는 자작자연(自作自演) 작품도 많아졌다.
3. 할리우드 경력: 1930년대
1935년,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한여름 밤의 꿈》을 연출하여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호평을 동시에 얻으며 할리우드의 주요 감독으로 부상했다.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미국화"에 대해 매우 엇갈린 평가를 받았지만 개봉 당시에는 성공을 거두었다.[4] 이후 폴 무니 주연의 전기 영화 3부작 《과학자의 길》(1936), 《에밀 졸라의 생애》(1937), 《후아레스》(1939)를 통해 큰 명성을 얻었다. 특히 《에밀 졸라의 생애》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루며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4]
디터리는 진보적 성향의 영화인으로서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를 지지하는 《봉쇄》(1938)를 제작하여 반파시즘적 신념을 드러냈다. 이 영화는 공개적으로 반파시스트적이었고 파시스트 독재자들이 잔혹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방관한 국가들을 비판했다. 1938년 그라우만스 차이니즈 극장에서의 초연은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취소되었고, 개봉 당시 약간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에는 미국 하원 반미활동 위원회와 같은 공산주의의 영향력을 조사하는 의회 위원회에 의해 의심스러운 영화로 언급되었다. 디터리와 이 영화의 각본가는 둘 다 부정적으로 평가받았다.[4]
3. 1. 대표작: 《에밀 졸라의 생애》 (1937)
3. 2. 대표작: 《노트르담의 꼽추》 (1939)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노트르담의 꼽추》는 15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꼽추 콰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디터리는 표현주의적인 조명과 어두운 분위기를 통해 중세 파리의 암울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묘사했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아냈다.
4. 할리우드 경력: 1940년대
윌리엄 디터리는 1940년대에도 여러 장르의 영화를 감독하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5]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1941)는 파우스트 전설을 바탕으로 한 고딕 판타지 영화로, 월터 휴스턴과 에드워드 아놀드가 출연했다.[5] 개봉 당시에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현재는 조셉 어거스트의 느와르 스타일 촬영과 버나드 허먼의 아카데미상 수상 음악으로 고전 영화로 평가받는다.[5]
앤드루 존슨 대통령에 대한 전기 영화 ''테네시 존슨''(1942)에는 반 헤플린과 라이오넬 배리모어가 출연했다.[5] 로널드 콜먼과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출연한 ''키스멧''(1944)의 리메이크에 이어, ''러브 레터스''(1945)에서는 조셉 코튼과 제니퍼 존스가 주연을 맡았다.[5]
제니의 초상(1948)은 조셉 코튼과 제니퍼 존스가 다시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5] 이 영화는 제작비가 급증하여 데이비드 O. 셀즈닉은 디터리의 계약을 파라마운트 픽처스에 매각해야 했다.[5]
1940년대 디터리는 워너 브라더스에서 에드워드 G. 로빈슨 주연의 전기 영화 두 편을 찍는 등 여러 스튜디오를 오가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었다.[5]
5. 후기 경력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윌리엄 디터리는 블랙리스트에 직접 오르지는 않았지만, 과거 스페인 제2공화국에 동조적인 영화 ''블로케이드''(1938) 제작과 나치 독일에서 사람들의 탈출을 돕고 베르톨트 브레히트를 비롯한 좌파 인사들을 지원한 경력 때문에 의심을 받았다. 그는 "블랙리스트에는 오른 적이 없었지만, 어떤 종류의 회색 목록에는 있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이로 인해 할리우드에서의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디터리는 미국에서 필름 느와르 ''터닝 포인트''(1952), 리타 헤이워드 주연의 ''살로메''(1953) 등을 제작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주연의 ''코끼리 걸음''(1954) 촬영은 미국 국무부가 디터리의 실론 여행을 불허하여 3개월간 지연되기도 했다. 유럽으로 돌아가기 전, 리하르트 바그너의 전기 영화 ''매직 파이어''(1955)와 ''오마르 카이얌''(1957)을 제작했다.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영화를 제작하던 디터리는, 진저 로저스와 함께한 미국 영화 ''퀵, 렛츠 겟 메리드''(1964)의 실패 이후 1965년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독일로 돌아간 그는 뮌헨 근처 타우프키르헨에 있는 극장 ''데어 그뤼네 바겐''(Der Grüne Wagen)의 감독이 되어 아내 샬롯 하겐브루흐와 함께 운영했다. 아내 사후에는 엘리자베스 다움과 함께 극장을 순회 극장으로 운영하며, 엘리자베스 베르그너를 상대역으로 앙상블을 연출했다.
디터리는 촬영장에서 항상 큰 모자와 흰 장갑을 착용하는 것으로 기억된다. 이는 초기 경력 동안 배우에서 기술자로 빠르게 역할을 전환하면서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1950년대가 되자, 매카시 선풍(레드 스케어)에 휘말려 여권을 압수당했고, 어쩔 수 없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그 후 서독에서 영화를 제작했다.
6. 작품 목록
''주요 작품은 볼드체로 표시하였다.''
- ''가면을 쓴 사람들''(1920)
- ''독수리 왈리''(1921)
- ''제노바의 음모''(1921)
- ''마리 앙투아네트, 왕의 사랑''(1922)
- ''루크레치아 보르지아''(1922)
- ''미스 줄리''(1922)
- ''여인의 희생''(1922)
- ''라 보엠''(1923)
- ''길가의 남자''(1923)
- ''탑''(1923)
- ''두 번째 총성''(1923)
- ''푸른 마누엘라''(1923)
- ''어머니와 아이''(1924)
- ''왁스웍스''(1924)
- ''현대 결혼''(1924)
-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1924)
- ''수탉''(1925)
- ''베를린에서 온 여자''(1925)
- ''남부 라인 계곡에서''(1925)
- ''번개''(1925)
- ''포츠담 광장의 꽃 파는 소녀''(1925)
- ''검과 방패''(1926)
- ''보헤미안 무용수''(1926)
- ''분홍 다이아몬드''(1926)
- ''밤의 고통''(1926)
- ''키르히펠트의 신부''(1926)
- ''쉬멕 가족''(1926)
- ''사랑의 지옥''(1926)
- ''삶의 서커스''(1926)
- ''가을의 사냥꾼''(1926)
- ''타락한 자''(1926)
- ''상수시의 방앗간''(1926)
- ''연인의 원''(1927)
- ''직조공''(1927)
- ''향수병''(1927)
- ''공공에서 제외됨''(1927)
- ''세상의 끝에서''(1927)
- ''제단 뒤에서''(1927)
- ''집시 남작''(1927)
- ''성녀와 그녀의 바보''(1928)
- ''사슬 속의 섹스''(1928)
- ''비올란타''(1928)
- ''도둑''(1928)
- ''밤의 기사''(1928)
-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며. 운터 덴 린덴까지''(1929)
- ''나는 당신을 위해 산다''(1929)
- ''봄의 속삭임''(1929)
- ''숲 속의 침묵'' (1929)
-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2세''(1929)
- ''춤은 계속된다''(1930)
- ''모비 딕''(독일어 버전, 1930)
- ''라스트 플라이트''(1931)
- ''키스메트''(독일어 버전, 1931)
- ''가면이 떨어진다''(1931)
- ''성스러운 불꽃''(1931)
- ''한 시간의 행복''(1931)
- ''그녀의 폐하, 사랑''(1931)
- ''원하는 남자''(1932)
- ''보석 강도''(1932)
- ''충돌''(1932)
- ''살아갈 6시간''(1932)
- ''진홍색 새벽''(1932)
- ''변호사''(1933)
- ''그랜드 슬램''(1933)
- ''사랑스러운''(1933)
- ''악마는 사랑에 있다''(1933)
- ''여성''(1933)
- ''본부에서''(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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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자와 거지''(크레딧 없음, 1937)
- ''또 다른 새벽''(1937)
- ''에밀 졸라의 생애''(1937)
- ''봉쇄''(1938)
- ''후아레스''(1939)
- ''노트르담의 꼽추''(1939)
- ''에를리히 박사의 마법의 탄환''(1940)
- ''로이터 통신에서''(1940)
-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1941)
- ''싱코페이션''(1942)
- ''테네시 존슨''(1943)
- ''키스메트''(1944)
- ''당신을 만나겠습니다''(1945)
- ''러브 레터스''(1945)
- ''우리들의 사랑''(1945)
- ''탐구하는 바람''(1946)
- ''태양의 결투''(크레딧 없음, 1946)
- ''제니의 초상''(1948)
- ''피고인''(1949)
- ''모래의 밧줄''(1949)
- ''전액 지불''(1950)
- ''화산''(1950)
- ''9월의 사건''(1950)
- ''다크 시티''(1950)
- ''베이징 익스프레스''(1951)
- ''레드 마운틴''(1951)
- ''부츠 말론''(1952)
- ''터닝 포인트''(1952)
- ''살로메''(1953)
- ''코끼리 산책''(1954)
- ''매직 파이어''(1955)
- ''스크린 디렉터스 플레이하우스: 하나 대 다수''(TV, 1956)
- ''오마르 카이얌''(1957)
- ''두브로프스키''(1959)
- ''세계의 정부''(1960)
- ''나는 줄리아 해링턴을 찾았다''(TV, 1960)
- ''카니발 고백''(1960)
- ''거대한 여행''(TV, 1961)
- ''가브리엘 실링의 탈출''(TV, 1962)
- ''정직해지는 즐거움''(TV, 1962)
- ''안티고네''(TV, 1962)
- ''고백''(1964)
- ''삼바''(TV, 1966)
6. 1. 영화 (배우/감독)
윌리엄 디터리는 1920년 《가면을 쓴 사람들》에 출연하면서 영화 배우로서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독수리 왈리》(1921), 《제노바의 음모》(1921)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 1922년에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의 사랑》, 《루크레치아 보르지아》, 《미스 줄리》, 《여인의 희생》 등에 출연했다. 1923년에는 《라 보엠》, 《길가의 남자》, 《탑》, 《두 번째 총성》, 《푸른 마누엘라》 등에 출연했다.1924년, 디터리는 《어머니와 아이》, 《왁스웍스》, 《현대 결혼》, 《카를로스와 엘리자베트》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25년에는 《수탉》, 《베를린에서 온 여자》, 《남부 라인 계곡에서》, 《번개》, 《포츠담 광장의 꽃 파는 소녀》 등에서 연기했다. 1926년에는 《검과 방패》, 《보헤미안 무용수》, 《분홍 다이아몬드》, 《밤의 고통》, 《키르히펠트의 신부》, 《쉬멕 가족》, 《사랑의 지옥》, 《삶의 서커스》, 《가을의 사냥꾼》, 《타락한 자》, 《상수시의 방앗간》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1927년 디터리는 《연인의 원》, 《직조공》, 《향수병》, 《공공에서 제외됨》, 《세상의 끝에서》, 《제단 뒤에서》, 《집시 남작》 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28년에는 《성녀와 그녀의 바보》, 《사슬 속의 섹스》, 《비올란타》, 《도둑》, 《밤의 기사》 등에 출연했다. 1929년에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며. 운터 덴 린덴까지》, 《나는 당신을 위해 산다》, 《봄의 속삭임》, 《숲 속의 침묵》,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2세》 등에 출연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도 디터리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1930년 《춤은 계속된다》, 《모비 딕》(독일어 버전)에 출연했고, 1931년에는 《라스트 플라이트》, 《키스메트》(독일어 버전), 《가면이 떨어진다》, 《성스러운 불꽃》, 《한 시간의 행복》, 《그녀의 폐하, 사랑》 등에 출연했다. 1932년에는 《원하는 남자》, 《보석 강도》, 《충돌》, 《살아갈 6시간》, 《진홍색 새벽》 등에 출연했다. 1933년에는 《변호사》, 《그랜드 슬램》, 《사랑스러운》, 《악마는 사랑에 있다》, 《여성》, 《본부에서》 등에 출연했다.
1934년 디터리는 《프리스코의 안개》, 《1934년의 유행》, 《마담 뒤 바리》, 《모니카 박사》(크레딧 없음), 《불새》, 《비밀 신부》 등에 출연했다. 1935년에는 《한여름 밤의 꿈》, 《소크라테스 박사》, 《과학자의 길》에 출연했다. 1936년에는 《백의의 천사》, 《사탄은 숙녀를 만났다》에 출연했다. 1937년에는 《위대한 오말리》, 《왕자와 거지》(크레딧 없음), 《또 다른 새벽》, 《에밀 졸라의 생애》에 출연했다. 1938년에는 《봉쇄》에 출연했고, 1939년에는 《혁명아 후아레스》, 《노트르담의 꼽추》에 출연했다.
1940년에는 《에를리히 박사의 마법의 탄환》, 《로이터 통신에서》에 출연했다. 1941년에는 《악마와 다니엘 웹스터》에 출연했다. 1942년에는 《싱코페이션》에 출연했고, 1943년에는 《테네시 존슨》에 출연했다. 1944년에는 《키스메트》에 출연했다. 1945년에는 《당신을 만나겠습니다》, 《러브 레터스》, 《우리들의 사랑》에 출연했다. 1946년에는 《탐구하는 바람》, 《태양의 결투》(크레딧 없음)에 출연했다. 1948년에는 《제니의 초상》에 출연했다.
1949년 디터리는 《피고인》, 《모래의 밧줄》에 출연했다. 1950년에는 《전액 지불》, 《화산》, 《9월의 사건》, 《다크 시티》에 출연했다. 1951년에는 《베이징 익스프레스》, 《레드 마운틴》에 출연했다. 1952년에는 《부츠 말론》, 《터닝 포인트》에 출연했다. 1953년에는 《살로메》에 출연했고, 1954년에는 《코끼리 산책》에 출연했다. 1955년에는 《매직 파이어》에 출연했다.
1956년에는 TV 시리즈 《스크린 디렉터스 플레이하우스》의 에피소드 "하나 대 다수"에 출연했다. 1957년에는 《오마르 카이얌》에 출연했고, 1959년에는 《두브로프스키》에 출연했다. 1960년대에도 디터리는 TV와 영화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60년 《세계의 정부》, 《나는 줄리아 해링턴을 찾았다》(TV), 《카니발 고백》에 출연했다. 1961년에는 《거대한 여행》(TV)에 출연했고, 1962년에는 《가브리엘 실링의 탈출》(TV), 《정직해지는 즐거움》(TV), 《안티고네》(TV)에 출연했다. 1964년에는 《고백》에 출연했고, 1966년에는 《삼바》(TV)에 출연했다.
6. 2. 기타
참조
[1]
웹사이트
William Dieterle dies
http://documents.lat[...]
1972-12-17
[2]
서적
The Big Tomorrow: Hollywood and the Politics of the American Way
Univ. of Chicago Press
[3]
웹사이트
Read the eBook Who's who in California (Volume 1942-43) by Russell Holmes Fletcher online for free (Page 67 of 235)
http://www.ebooksrea[...]
[4]
서적
World Film Directors
The H.W. Wilson Company
[5]
서적
The New Biographical Dictionary of Film
Little, Brown & Alfred A. Knopf
[6]
웹사이트
William Dieterle
http://www.steffi-li[...]
Steffi-line
2020-12-05
[7]
간행물
Wildwest am Rhein: Erinnerungen an das Pfälzer Hollywood : das filmhistorische Leseb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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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Ziegler-Schwa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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